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고미숙 지음
백수라도 행복할 것
아주 오래전에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라는 책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인연을 계기로 같은 저자가 쓴 책,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를 읽게 됐다. 출퇴근 시간에 밀리의 서재로 가볍게 읽기 시작하다가,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 종이책으로 사 읽어야겠다 해서 오래오래 깊게 읽었다. 연말에 경주여행에도 들고 가서 호텔에서 해가 뜨는 거 보면서 읽고, 연초에는 우리집 소파에 앉아 해가 뜨는 걸 보면서 읽은 책. 대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20대 중반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던 책이었다.
책 주제, 연암 박지원과 백수
책의 주제는 크게 4가지다.
- 노동에서 활동으로
- 경제적 자유, '자립'
- 친구 사귀기
- 네버엔딩 배움
연암 박지원은 양반이었지만 관직을 거부했는데, 한마디로 조선판 백수였다. 조선 백수와 지금의 청년 백수가 만나는 지점이다. 즉, 인문학과 현실이 만나는 글이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백수도 당당해야 한다"이다. 백수라고 꿀릴 것 없고 정규직을 바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이제는 직장이라는 개념, 특히 정규직이라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백수는 자기의 마음과 세상, 인생을 공부하면 된다. 그녀는 "백수라고 '쫄면' 안된다. 당당해야 한다. 그리고 유쾌해야 한다.(81p)" 고 했다. 정규직이 타임 푸어라면 백수는 타임 리치라고 설명한다. 그녀의 시선은 유쾌하다.
저자는 백수에게 쫄지말라고 한다. 맞다. 백수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위축되어 버린다. 자기가 자신의 세계를 제한해버리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 굴레는 벗어나려면 피해의식에서 헤어 나와야 한다. (열등감, 피해의식, 남과의 비교. 나는 이 3가지를 인생을 해치는 3대 악으로 정의한다.)
백수생활의 끝 즈음에 쓴 글
2017년 8월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할 것이 참으로 많다. 각종 자격증 준비, 자기소개서 쓰기, 인적성 문제 풀기, 경영 공부, 면접 준비, 시사상식 쌓기(신문 읽기) 등. 결론적으로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하려면 평소에 성실하게 살며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취업준비는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다.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고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도 하고 새로운 다짐도 한다. 표정과 말투, 태도도 다듬는다. 스터디를 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길고 긴 취업과정에서 무너지지 않고 keep going 할 수 있는 것은 성장하는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단단하게 중심 잡힌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쓰고 약 3개월 정도 뒤에 인생의 전환점이 왔다. 취업을 했고 인생이 확 뚫리기 시작했다. 취업준비를 하던 백수시절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정신적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나를 수련할 수 있었다. 책에서 "집 밖으로 나가라"고 한 것처럼, 당시에 나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스터디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요가를 했다. 백수라서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당당하고 즐겁게 공부했다. 그 계기는 "모든 순간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이 생각의 씨앗 하나였다.
청년 백수, 중년 백수, 노년 백수 등 수명이 길어지고 세상이 변하면서 누구든 언제든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백수'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백수'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고쳐져야 할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도 백수 시절에 스트레스가 컸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혼자 지레 겁먹고" 백수라는 상황 자체에 혼자 스트레스 받았던 것 같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동시에 백수는 정신적으로 가장 충만한 시기이기도 하다. 백수일 때는 진짜 시간이 많다. 하루에 1시간씩 신문을 보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배웠고 매일 신문을 읽다 보니 논리적으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표현하는 능력도 좋아졌다. (하루에 1시간씩이나 신문을 봤다니. 그것도 매일.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여유로웠던 시절이다.)
살맛나는 인생
살맛. 서로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그렇게 정이 오고 가는 것. 이런 게 중요하다는 것과 이게 진짜 인생의 기쁨이자 보람이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에 책에서 이런 문구를 만나 반가웠다. 나는 어쩌면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 조금 소홀했던 게 아닐까 싶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기쁨, 정이 오고 가는 것, 이런 것들에 무심했다. 결혼을 하면서 '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상대방이 고마워하는 마음과 축하해주는 마음은 거부하지 말고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며, 주변 사람들이 어려울 때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주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함께 기뻐해 주며 표현하기.
진짜 신나게 장단을 타듯이 단숨에 읽어내려 간 책이다! 연암 박지원과 청년 백수가 교차하는 지점, 그 인문학적 통찰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힘차고 당차고 유쾌하게 글을 풀어나간다. 글을 읽는데 독자가 신이 난다.
대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좀 더 당당하고 행복한 취준생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백수 시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으니 됐다. 내가 백수생활을 탈출한 경로가 작가가 말한 딱 그 방법이었다. 돌이켜보았을 때 이 백수생활은 나에게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나는 이때 가장 많이 정신적으로 성숙했다. 그 당시에는 성숙해지고 있다는 걸 몰랐으나, 지나고 나니 아주 단기간에 많이 성장한 시기였다.
우선 백수니까 시간이 많아서 생각할 시간도 많고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할 시간도 많았다. 매일 일기를 썼고 그 시절 남긴 메모의 양은 어마무시하다. 중요한 건, 그때의 사유가 지금의 나를 만든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시간이 많으니까 책도 많이 읽었다. 그때는 독서가 도피처럼 느껴졌는데, 아니, 도피가 맞는데, 책에서 배우고 배운 걸 실천했더니 삶이 풀리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인생에서 막혀있었던 건지 2017년부터 착착 인생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로는 하는 일마다 잘됐다.
책에서 배운 것들
-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는다. 살다보니 꿈도 이루고 사랑도 하고 돈도 버는 것이다. 즉, 삶이 먼저다! 현존하는 것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다. 이 대목은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와 일치한다. 존재 자체가 우선이다.
- 사람은 성장하면 집을 떠나야 한다. 자립해야한다. 가족에게 얽매이고 의지해서는 안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 집에서 살면서 부모님이 내 방을 청소해준다면 그건 갑질'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 스스로 밥을 차리고 먹고 치우고, 하루 세끼를 책임지는 능력이 중요하다. 자립!
- 사람은 좁은 방안에 틀어박혀있거나, 혼밥을 하거나, 사람을 멀리하면 안 된다. 사람을 만나야 말이 흐르고 생각이 흐른다. 나가서 무작정 걸어라! 몸이 유연해야 생각도 유연해진다.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하자.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이는 것. 지금 당장 잘 살 것. 인생을 유예시키지 말 것.
사람이란 born to be travellers.
인생에서 유머를 빠뜨리지 말 것.
잘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잘 살아야한다.
지금 당장! 일상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p88)
내 20대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줄을 아주 많이 그었다. 내 주위에 백수가 있다면, 혹시 백수라는 생각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선물해주고 싶다. 이 책은 경주에서 읽었고, 서울의 어느 북카페에서 읽었다.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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