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피부
Flesh of Summer
이현아 지음
#그림에세이 #그림책추천
이현아 작가는 노트의 한쪽에는 그림을, 다른 한쪽에는 글을 쓰면서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때 일기와는 다른 글이 쓰였다고 한다. 그 그림일기가 이 책의 바탕이 되었다. 책 내용은 '파랑'과 '그림' 그리고 작가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한 편의 그림이 한 사람에게 닿아 이토록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림의 힘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려고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했다. 지하철에 앉아 책을 펼쳐 파랑의 그림과 이현아 작가의 아주 사적인 글들을 읽다보면 순식간에 이야기에 집중하고는 했다.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것들이었는데,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대부분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 작품이 등장했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쉬는 여성,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는 여성, 창문 넘어 어딘가를 바라보는 여성, 꽃을 들고 있는 여성 등. 작가는 이런 그림을 보며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거나 우울, 고독 등의 감정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나에게 이 여성들의 모습은 그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림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든 간에 일상의 한 순간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포착되어 묘사된 여성들의 모습은 그저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를 차지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들은 그저 아름다웠다.
p60. 내게 유년기는 지나간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어떤 장소 같다. 내가 가본 적 있는 혹은 살았던 적 있는, 그러나 꿈처럼 기억은 희미한 곳.
p68. 유년의 땅은 늘 불안정하다. 그곳이 대체로 타인에 의해 설계되므로. 자신이 설계할 수 없으므로. 그러나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서로의 유년에, 그 장소에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유년기는 자신이 설계할 수 없으므로 불안정하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됐다. 이 진실을 유년에는 알지 못했다. 이 진실을 깨우치면 유년의 불행과 고통이 괜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니므로. 모두가 자기만의 유년의 아픔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유년의 아픔이 괜찮아지기도 했다. 모두가 각자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연대감 같은 게 생기고 나도 왠지 괜찮아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유년기의 슬픔과 고통이 내 행복과 미래를 결정짓게 놔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졌다.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순간이었다.
몇 번을 읽었던 문장.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식사의 모습이다. 영감을 주고 나를 가두지 않으면서도 무겁지 않은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가는 식탁. 풍요로운 여유가 흐르는 시간.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보면, 이런 식사 자리를 관장하는 것은 어렵다. 나도 언젠가 풍요로움으로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p207. 동네는 낯설고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당연히 약속도 없고 의무도 없다. 원할 때 얻을 수 있는 고독은 사치스러운 것이다.
나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해야 할 의무가 하나도 없는 상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
p75. 우리는 몸으로 계절을 산다. 여름은 더워서 좋아, 겨울은 추워서 싫어. 저마다의 몸이 다른 것처럼 계절을 살아내는 방식도 수천가지다.
이제 10월의 시작. 가을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창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으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지고, 산책을 나가면 겨드랑이 사이로 시원하게 부는 사람에 상쾌하다. 반신욕을 하고 이불 속에 파묻혀서 책을 읽고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 왔다.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좋아하는 계절이 없다. 도저히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봄은 봄이라서, 여름은 여름이라서, 각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기운과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좋다. 추위에 약해서 예전에는 겨울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겨울마저 좋아져버렸다. 어렸을 때는 둔했던 것인지 스스로에게 과몰입해서 주변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인지 계절의 변화를 잘 몰랐다. 이제는 계절의 변화를 정말 온몸으로 느낀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 다시 그 계절이 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북적거리는 도심에 살다가 자연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된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파랑의 그림과 작가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책을 덮고 나서도 깊이 여운이 남는다. 그래서 자꾸만 책을 다시 펼쳐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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