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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작별들 순간들 - 배수아 산문

by 민히 2023. 7. 24.

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책을 읽는 내내 산책이 하고 싶어졌다.
산문을 읽으며 봄과 여름,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고,
가을이 지나가고 물이 얼어버리는 겨울이 오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꼈다.

 

너무나 아름다운 글이었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이 책을 읽었는데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지만 베를린으로, 독일의 시골로, 시골 오두막집으로, 모로코를 다녀온 기분이다. 이 책은 독일 베를린 근교의 어느 시골 오두막 집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읽고 쓰는 일에 대하여, 독일 문학에 대하여, 여행에 대하여, 자연과 숲과 산책에 대하여 말한다. 책에는 그가 사는 정원이 딸린 오두막집이나 호숫가의 사진이 없는데도 그 풍경이 선명하게 머릿 속에 그려졌다. (책 끝에 호숫가의 흑백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생각보다 현대적인 풍경이라 잠깐 놀랐다.)

 

p21

해가 지면 나는 침대에 기어들어가 추리소설을 읽었다. 그늘진 정원은 싸늘했고 우리는 불을 피웠다. 그곳에서 나는 말그대로 시간이 정지된 것을 체험했다.

 

p25

한여름 오후, 벌들이 잉잉거리는 정원, 꿀빛 햇살, 치즈를 올린 빵 한 쪽, 엘더베리꽃 시럽 주스. 그토록 찬란한 여름날, 아무런 말도 없는. 아무런 기록도 없는.

 

p110

상실을 겪거나 배반 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수치스러울 때면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거나 쓰면서 마음을 달랠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간절히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힘든 순간을 떠올려보면 '상실을 겪거나 배반 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스스로 수치스러울 때'가 맞다. 그럴 때 읽고 쓰면서 마음을 달래는 것. 텍스트로 읽기만 해도 치유되는 기분이다.

 

p128

이곳 시골 생활의 고독은 도시의 고독과는 완전히 다르다. 떠밀려오는 파도가 없다. 우리는 다급하게 밀려간다는 느낌이 없다. 하루하루는 호수의 물살처럼 잔잔하다. 우리는 거의 거울을 보지 않는다.

 

p250

한 권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고.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 다른 사건이지 책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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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들 순간들
한국문학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은 낯설고 이국적인, 매혹과 비밀스러움이 그득한 영토의 푯말로 쓰인다. 신작 『작별들 순간들』은 읽기와 쓰기, 작가로 존재하기에 대해 쓴 산문으로 그 영토를 여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조금씩 그 땅을 디디다보면 어느 순간 빽빽한 투야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오두막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그곳에는 정원의 삶과 읽고 쓰는 삶만이 있다. 목가적인 것과는 다르다. ‘벗어난 것’에 가깝다. 익숙한 고통과 근심에서, 언어에서, 나 자신에서 벗어났을 때 새로이 느낄 수 있는 순간들, 그것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화음들. 배수아 작가는 베를린 인근 한 시골 마을의 정원 딸린 오두막을 15년 가까이 오갔다. 처음에는 시차를 두고, 그러나 점점 더 오래 그곳에 머물게 되었고 마침내 살게 되었다. 자신에게 중요해지리라 짐작하지 못한 채 중요해지는 장소가 있다. 특히 배수아 작가는 한국에 체류할 때는 번역을, 독일 오두막에 머물 때는 본인의 작품을 쓰는 식으로 작업해왔기 때문에 이곳은 더욱 특별해진다. 작가는 자신이 ‘정원에 속한 사람’이 되어갔으며 그것은 자신의 글쓰기의 성분과 정신, 철학을 모두 포함한 글쓰기의 양태가 오두막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더불어 이 산문집은 특정 ‘장소’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장소에 있었음으로 인해 쓸 수밖에 없는 글’이라고도. 소설가의 산문을 엮어 책으로 내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여러 매체에 실은 시의적 산문들을 정리한 책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콘셉트 아래 써내려간 산문집.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읽기와 쓰기, 작가로서 존재하기에 대한 배수아 작가 특유의 세계가 베를린과 인근 시골마을의 오두막 정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긴 호흡의 산문으로, 2022년 5월부터 10월까지 문학동네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밀도 높게 연재된 원고를 바탕으로 한다. 연재 당시 제목은 ‘순간들 기록 없이’였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83쪽) 가을에서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나는 두 권의 책을 번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모든 언어는 외국이다.”) 글쓰기는 언어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나는 무성영화와 같은 글을 쓰고 싶어.”) 나는 스스로 만든 언어 안에 거주하기를 원했다. 존재는 거주이다. 내 거주는 글쓰기 안에 있었다. (“내 언어는 무너지는 집이다.”) 어린 시절 이후 나는 어디에서 살아왔던가? 항상 나는 내 최초의 집을 생각한다. 내게 최초로 말과 글을 가르쳐준 이는 누구였을까? 글을 쓸 때, 나는 종종 눈앞에서 허물어지는 화가의 아틀리에를 상상한다. (232~233쪽)
저자
배수아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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