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책을 읽는 내내 산책이 하고 싶어졌다.
산문을 읽으며 봄과 여름,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고,
가을이 지나가고 물이 얼어버리는 겨울이 오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꼈다.
너무나 아름다운 글이었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이 책을 읽었는데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지만 베를린으로, 독일의 시골로, 시골 오두막집으로, 모로코를 다녀온 기분이다. 이 책은 독일 베를린 근교의 어느 시골 오두막 집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읽고 쓰는 일에 대하여, 독일 문학에 대하여, 여행에 대하여, 자연과 숲과 산책에 대하여 말한다. 책에는 그가 사는 정원이 딸린 오두막집이나 호숫가의 사진이 없는데도 그 풍경이 선명하게 머릿 속에 그려졌다. (책 끝에 호숫가의 흑백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생각보다 현대적인 풍경이라 잠깐 놀랐다.)
p21
해가 지면 나는 침대에 기어들어가 추리소설을 읽었다. 그늘진 정원은 싸늘했고 우리는 불을 피웠다. 그곳에서 나는 말그대로 시간이 정지된 것을 체험했다.
p25
한여름 오후, 벌들이 잉잉거리는 정원, 꿀빛 햇살, 치즈를 올린 빵 한 쪽, 엘더베리꽃 시럽 주스. 그토록 찬란한 여름날, 아무런 말도 없는. 아무런 기록도 없는.
p110
상실을 겪거나 배반 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수치스러울 때면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거나 쓰면서 마음을 달랠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간절히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힘든 순간을 떠올려보면 '상실을 겪거나 배반 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스스로 수치스러울 때'가 맞다. 그럴 때 읽고 쓰면서 마음을 달래는 것. 텍스트로 읽기만 해도 치유되는 기분이다.
p128
이곳 시골 생활의 고독은 도시의 고독과는 완전히 다르다. 떠밀려오는 파도가 없다. 우리는 다급하게 밀려간다는 느낌이 없다. 하루하루는 호수의 물살처럼 잔잔하다. 우리는 거의 거울을 보지 않는다.
p250
한 권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고.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 다른 사건이지 책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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