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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J. D. 샐린저
가식과 위선을 참지 못하는 '홀든 콜필드'의 3일간의 뉴욕 방황기.
공부할 마음이 없어 펜시 고등학교에서 쫓겨나고 부모님이 무서워 집으로 바로 갈 수는 없는 이 아이는 뉴욕을 방황한다. 가식을 미치도록 못견뎌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가식을 버리지 못한다.
이 아이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불행해졌을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동생의 죽음, 같은 학교를 다니던 친구의 죽음, 동성으로부터의 성희롱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이 아이의 꿈은,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호밀밭을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 아이들이 세상의 가식과 위선 같은 것들은 평생 모르고 순수함을 지키게 해주는 파수꾼. 대책없이 삐뚤어져 있던 이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순수한 것들을 지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니. 그래서 남자 기숙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무의미한 권력 다툼과 교사들의 위선 같은 것을 견딜 수 없었구나.
홀든이 지키고자 하는 이 순수의 상징은 바로 그의 여동생 피비로 대표된다. 홀든을 지켜낸 것도 결국 피비의 순수함이었다. 그는 절대 순수함을 모른 척 할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불안했다. 홀든 콜필드는 뉴욕에서 혼자 지내며 그동안 모든 용돈을 마구 쓰고 다닌다.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타고 다니며 클럽에 가고 호텔에서 자고 돈을 뺏기기도 한다. 이렇게 돈을 막 쓰니까 돈이 조금씩 떨어지는데, 나는 이 돈이 다 떨어졌을 때 이 아이가 자살하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다행히 그런 결말은 아니었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으면서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걸 보고는 아, 이 모순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청소년이고 사람은 모두 마음 속에 모순된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책의 의미는 책을 덮고 나서야 왔다. 책을 읽을 때만 해도 홀든 콜필드의 우울과 절망의 이유가 궁금했고, 그의 어린시절이 궁금했고, 지독한 방황을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소설의 결말만 궁금해하며 봤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생각하면 할수록 홀든 콜필드의 행동들, 이를테면 여동생 피비에게 한 꿈 이야기라든지, 피비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바꾼 것이라든지, 속물에게는 면전에서 욕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아이여서 처음 본 수녀에게 기부금을 낸 일이라든지 그 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
이 모든 이야기는 홀든 콜필드가 형 D.B.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다.
나는 가식과 위선에 얼마나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내 말과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내용이 공허하거나 나에게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말할 때,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나를 속이기는 힘들다. 내가 입 밖으로 내뱉는 말과 마음이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 기적처럼 있다. 진짜 꼭 필요한 말을 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을 나도 믿을 때는 공허하지 않다.
p41, <뜻밖의 좋은 일>,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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