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Crying in H mart
미셸 자우너 지음 / 정혜윤 옮김
상실, 회복, 성장의 이야기
음식으로 치유하기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모르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면서 하염없이 엄마 생각이 난다. 내가 엄마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는 것, 나는 엄마의 유산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뿌리는 우리 엄마고, 이런 든든한 뿌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흔들림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족이라는 것이 당연한 존재 같지만, 가족이 있기에 내 마음의 심지가 굳건할 수 있다.
어느 순간 책 인스타그램 계정 피드가 이 책으로 도배된 적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극찬했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모두가 읽고 극찬하는 책을 나는 왠지 선뜻 읽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갑자기 이 책을 읽게 됐는데 단숨에 빠져들었다. 미셸 자우너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그래서 내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이 풍요가 어디서 온 것인지 깨닫게 됐다.
책을 읽기 전에는 '미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이 엄마를 잃고 그리워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은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미셸 자우너가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성장하는 시간,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김장 김치를 담그며 엄마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회복해가는 시간을 담았다. 그녀는 '내 곁에 엄마가 없는데 내가 한국인일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었지만, 미셸 자우너 자체가 엄마가 남긴 유산이었다. 딸은 엄마의 유산.
이 책은 단순히 엄마를 잃고 회복하는 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것을 담고 있다. 딸은 엄마의 유산이라는 것, 엄마로부터 세상을 배웠다는 것, 엄마를 통해 한 문화가 고스란히 딸에게 전해진다는 것.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한국음식이다. 저자 엄마가 해준 음식, 저자가 2년마다 한번씩 서울에 왔을 때 먹은 음식들, 엄마가 아플 때 먹었던 음식들,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녀가 만든 음식들.
음식의 힘은 대단하다. 음식에는 대단한 치유의 힘이 있는데 마음이 헛헛할 때는 따뜻한 집밥 한그릇 먹고 나면 다 괜찮아진다. 요즘 나는 왠지 속이 허했는데 한국음식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간단하더라도 밥을 해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내준 햅쌀로 밥을 짓고 엄마가 보내 준 상추와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벼먹을 때도 있고, 엄마가 보내 준 깻잎 반찬과 간단히 먹을 때도 있다. 소박한 이 식사가 허한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었다.
저자의 엄마처럼 우리 엄마도 음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엄마가 매 계절마다 보내는 택배가 나를 먹여 살린다. 고추장, 간장, 된장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 수 있다며, 마트에서 산 제품이 아니라 방부제를 넣지 않은 각종 장을 보내주신다. 김장철이 되면 새 김치가 차곡차곡 담긴 김치통이, 11월이 되면 햅쌀이라며 백미 한 포대, 찹쌀 한 포대가 집으로 도착한다. 그 사이사이 고구마, 귤, 상추, 감자, 어묵 등 각종 식재료가 도착한다. 다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인데도 내가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맛있는 것이라며 보내주신다. 우리 엄마는 손도 커서 남편과 나, 두 사람이 먹어낼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음식을 보내주시는데 그게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책의 문장들
p75. 울긴 왜 울어!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p62. 우리 엄마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언제나 열 발짝 앞을 내다보는 사람.
우리 엄마 같은 대목.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울긴 왜 우냐는 말은 우리 엄마만 하는 말인 줄 알았던터라 이 대목이 나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 엄마도 외할머니에게서 듣고 배운 거겠지. 이렇게 한 사람의 문화가 세대를 거슬러 흘러가나보다. 우리 엄마도 내가 울면 절대 달래주지 않고 울 일도 없다며 어이가 없다는 뜻이 쳐다보곤 했었다.
p64. 나는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서 떨어져 지낸 그 모든 세월에 대해, 한국을 떠난 것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를 죄책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늘 바빴다. 엄마도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고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에 이런 생각을 할 떄도 있지 않았을까.
p81. 피터는 인내심이 많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엄마가 아빠에게 그랬듯이 내 성격을 보완해주었다.
나도 그렇다. 남편의 느긋하고 넓은 마음, 인내심이 급한 내 성격을 보완해준다.
p85. 피터가, 굳이 오지 말라고 한 내 말을 듣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웠다. 피터는 한참 지나서야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 부모님이 자신에게 먼저 전화했노라고. 엄마가 아프다는 걸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았노라고. 내가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에 반드시 내 옆에 있겠다고 두 분에게 약속했노라고.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 지나갈 때까지 자기가 내 옆에 있겠노라고.
너무나 슬펐던 부분.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심장이 뛰었던 대목...
p195. 엄마가 드디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낸 데 열광했다.
p203.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p218. 사실 유일하게 확신한 것은, 혹시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결혼 준비를 빈틈없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엄마밖에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p256. 우리는 엄마가 죽기를 기다렸다.
p281. 당신은 너무너무 아름답고 친절하고 좋은 여인이에요.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p338. 나는 그저 어딜 간다는 게 마냥 신나기만 했지 그 여행이 엄마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나라가 엄마의 얼마나 중요한 일부였는지는 까맣게 몰랐다.
p371. 내가 후회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이 엄마의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p372.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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