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문학동네
8개의 단편소설집은 상실의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잃어 슬픔을 떨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희망적이었다. 8개의 단편 소설을 관통하는 글은 첫번째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다. 김연수 작가는 이 단편에서 '미래를 기억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는데 이 개념이 모든 단편을 관통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냥 후루룩 읽었다. 마지막에 책의 끝에 실린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몇몇 소설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 아래의 문장들이 나에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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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누가될 수 있는지 깨닫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 뿐이다.
미래에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면 현재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살면 "그 긴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한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을 중심으로 봤더니, 8개의 단편을 읽었지만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다.
단편 중에서 가장 재밌게 본 것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이었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P118. 그곳에서 인류의 시작 이전의 시간, 그것도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쌓여 있었다. 그는 비로소 시간을 중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P121.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 삶이 되기 때문이지.
P126~127. 이십대 초반이 될 때까지 그 존재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고도 사랑하게 될 줄을 알지 못하다가, 십 년쯤 뒤에 다시 만나 사랑을 하고, 또 그렇게 몇십 년을 함께 살다가 헤어진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에 대해, 눈 깜빡할 사이에, 마치 폭풍처럼 지나간 인생에 대해.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은정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때는 그저 은정이 이야기를 재밌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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