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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정희재 <아무튼, 잠>, 밤은 지친 인간을 감싸는 검은 붕대이자 효과 빠른 진통제다.

by 민히 2023. 1. 17.


아무튼, 잠
정희재


 

너무 너무 너무 좋아하는 정희재 작가. 신간이 나왔다고, 게다가 아무튼 시리즈라고 해서 고민하지 않고 바로 교보 장바구니에 담고 주문했다. 잠으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잠을 주제로 책 한 권이 채워졌다니 어떤 이야기일까? 과학책도 아닐텐데? 하는 궁금증으로 책을 펼쳤다.

결론은 잠에 대한 예찬이다. 잠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다가 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예전에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한창 인기였을 때 잠을 자지 않는 뱀파이어를 보고 좋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졸리지 않으면 재밌는 일을 밤새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아아... 이런 생각을 했을 때는 얼마나 어렸는지 ㅋㅋㅋ 신나게 놀던 20대 초반이었다. 이제는 안다. 잠은 축복이라는 것을. 특히나 불면증의 비읍도 모르고 사는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 잠에 대한 예찬
P10. 잔다는 건 결핍과 욕망의 스위치를 잠깐 끄고 생명력을 충전하는 것. 잠이 고통을 흡수해준 덕분에 아침이면 '사는게 별건가' 하면서 그 위험하다는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솟았다.
가장 좋았던 문장.

P75. 밤은 지친 인간을 감싸는 검은 붕대이자 효과 빠른 진통제다.

P22. 아침에는 항상 상황이 나아진다.
Things are always better in the morning.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중.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그 이전보다 나은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전원이 나간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자고 일어나면 생명력이 충전되어 오늘 하루도 잘해보자, 다짐하게 된다. 큰 고통도 자고 일어나면 고통의 세기가 조금은 옅어져 있다.


P42. 이 인간을 나를 어떻게 믿고 태평하게 자고 있을까.
P137. 잠든 이는 연약하고 무능하다. 영혼은 어디론가 떠나고 껍질만 이쪽에 있는 것 같다. 몸은 가까이 있지만 어느 때보다 단절돼 있는 순간. 그 단절이 있어야 우리의 연결은 순조로워진다.
내 옆에서 잠든 남편을 보고 똑같이 생각한 적이 있다. 어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몸을 축 늘어뜨린채로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을까. 서로의 곁에서 이토록 편하게 잠들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이 새삼 신비롭다.


P139.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사치스러운 소망이 생긴다. 괴로움이 오더라도 품위 있게 받을 수 있기를. 운명을 헤쳐나가면서도 온화함과 편안함을 잃지 않기.

p23. 끝내 외면한다면 아마도 어떤 진실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소외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P33. 고통과 욕망은 어딜 가나 따라왔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어딜 가건 이전의 삶은 고스란히 따라온다.
저자는 20대 시절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잠을 잤다고 했다.

 

 


제대로 잠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안쓰럽다. 쪽잠을 자거나 잠을 억압 당하는 삶은 슬프다. 책에는 잠을 쫓는 약까지 먹어가며 일을 해야했던 노동자들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독서실 좁은 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밤을 새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또 가장 못한다. 어떤 영화에서 고문 방법으로 잠을 못자게 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잠을 며칠만 못자도 헛것이 보이고 정신 상태도 이상해진다고 한다.) 우리 아빠는 젊었을 때는 논다고 며칠씩 밤을 새고 또 일한다고 며칠씩 밤을 샜다고 하시며, 젊은 애가 잠 자는 것을 왜 그렇게 챙기냐며 뭐라고 하셧지만, 나는 진심으로 잠이 보약이라고 믿는다. 아마 아빠 세대 때는 잠은 죽어서 실컷 잘 수 있으니까 잠을 줄여서라도 목표를 이뤄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수면이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잠을 포기해가며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 잠을 빼앗긴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다.


* 뜬금없이 밀크티가 먹고 싶어지는 문장
끓는 물에 홍차와 생강, 설탕을 넣고 우리다가 우유를 넣는다.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게 한소끔 끓인 뒤 넘치려는 순간, 불을 끄면 밀크티가 완성된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따뜻한 밀크티 한 잔 만들어 마시고 푹 자고 싶다.

 

 
아무튼, 잠
‘아무튼 시리즈’ 53번째 이야기는 ‘잠’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로 10만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진 작가 정희재가 긴 침묵을 깨고 발표하는 신작 에세이이기도 하다. 전작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통해 우리에게 ‘힘들면 잠시 내려놓고 쉬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한 작가는 더욱 깊고 단단해진 사유를 통해 “아침이면 ‘사는 게 별건가’ 하면서 그 위험하다는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를 주는 ‘잠’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에는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잘 데가 없어 학교 문예부실에서 청했던 도둑잠, 대학 시절 마치 신생아처럼 기숙사에 처박혀 내리 잤던 통잠, 히말라야 계곡에서 기절하듯 쓰러져 경험한 단잠, 인도 여행 중 잠 수행을 한다는 슬리핑 라마를 찾아 나선 이야기까지 잠과 관련한 인생의 여러 순간이 담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슬라임처럼 만지면 만지는 대로 형태가 변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잠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잠의 얼굴에서,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일이기에 줄여야 하고 쫓아야 한다고 여기는 ‘죄책감’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그렇게 『아무튼, 잠』은 깨어 있는 일의 고단함 앞에서 눈을 질끈 감은 우리 옆에 나란히 누워 나직하게 속삭인다. “자는 동안 지나가는 것들이 있다”고. “예를 들면, 편두통과 불안, 욕망, ‘맙소사, 이게 인생의 전부라고?’ 싶은 허망한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쉬”라고.
저자
정희재
출판
제철소
출판일
2022.10.31


이 책의 추천곡은 페퍼톤스의 <coma>가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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